전국민의료보험 및 강제지정제가 정부에 의해 강압적으로 시행된 이후부터 의료기관들은 관행 수가에 훨씬 못 미치는 저수가를 감내해야 했다. 의료기관들은 의료보험 확대로 인해서 늘어난 의료이용량 증가와 행위량 증가로 겨우 버티고 있었지만, 정부 입장에서는 이렇게 늘어나는 의료 이용량과 행위량을 통제하기 위한 방법이 필요하였다. 그래서 불법 및 허위 청구를 막고, 건강보험 재정의 안정화를 위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하 심평원)을 설립하여 의료기관들의 청구 내역을 심사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심평원의 심사 기준이 지역이나 심사 담당자에 따라서 다른 경우가 많았고, 의학적인 기준과도 동떨어진 경우가 많아서 반드시 필요한 의료 행위도 부당 의료행위로 간주되어 삭감되는 경우가 많아졌다. 의료기관들은 가뜩이나 저수가에 허덕이고 있는데, 여기에 더해서 불분명하고 부당한 기준을 통한 심사로 이루어지는 무분별한 삭감은 의료기관들을 존폐의 위기로 몰아넣고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의료계 내부적으로 부당한 심사체계 개편에 대한 요구가 커지고 있었고, 지난해 의정합의를 통해 의정간 심사체계 개편 협의를 시작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최근에 발표된 심사체계 개편안의 내용은 의료계가 생각했던 방향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고, 이에 대처하는 의협의 자세는 실망스럽다 못해 회원들로 하여금 의협을 불신하게끔 만들고 있다. 이에 대한병원의사협의회(이하 병의협)는 현 심사체계 개편의 문제점과 의협의 실책을 구체적으로 지적하고자 한다.

1. 정부가 추구하는 의료의 가치(Value)는 진정 가치 있는 의료라고 말할 수 없다.

지난해 12월 27일 보건복지부는 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이하 건정심)에 청구명세서 기반의 건별 심사방식에서 ‘가치에 기반한 (value-based) 심사·평가체계’로 근본적으로 전환하는 방안을 주 내용으로 하는 『건강보험 심사·평가체계 개편 방안』을 보고하였다. 정부가 발표한 가치(Value)에 기반한 심사평가체계라는 개념은 일견 보았을 때는 굉장히 합리적인 것처럼 보인다. 당연히 가치가 높은 의료 행위를 하는 것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심사 및 평가체계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하겠지만 여기서 말하는 가치는 통상적인 개념의 가치가 아니다. 정부가 설명하는 가치의 개념은 의료의 질(치료결과 등)을 비용으로 나눈 것이다. 결국 정부가 말하는 의료에 있어서의 가치는 치료결과가 좋을수록 높아지고, 비용이 낮을수록 높아진다. 

의료 행위를 함에 있어서 의료의 질은 쉽게 향상되지 않는다. 높은 의료의 질을 구현해내기 위해서는 보다 좋은 인력과 시설, 시스템 등의 인적, 물적 인프라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런 인프라는 공짜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막대한 비용 투자가 필요하다. 하지만 우리나라 정부는 의료의 질 향상을 위한 인프라 구축에 어떠한 지원도 해주지 않았으면서 의료기관들에게 갑자기 질 향상을 요구하고 있다. 인프라 구축은 단기간에 이루어지지도 않을 뿐더러 영세한 의료기관들은 이를 엄두 조차 내기 어렵다. 이렇게 되면 이미 상대적으로 훨씬 좋은 인프라를 구축하고 있던 상급종합병원들이 질 평가에서 좋은 점수를 받게 되어 많은 인센티브를 차지할 수 밖에 없다. 이는 결국 1, 2차 의료기관의 경영난을 악화시켜 의료기관의 줄도산을 야기하고, 상급종병 쏠림 현상이 더욱 가속화되는 결과로 나타날 것이다.

정부가 말하는 가치 있는 의료를 달성하기 위한 방법 중 의료의 질 향상 이외에 다른 한 가지 방법은 바로 비용 절감이다. 똑같은 치료 결과를 달성했다고 하더라도 치료 결과 달성에 보다 적은 비용이 투입된 것을 더욱 가치 있는 것으로 보기 때문인데, 정부가 심사체계를 ‘가치 기반’으로 개편하려는 가장 중요한 의도가 바로 여기에 있다. 같은 의료행위를 하더라도 보다 적은 비용을 청구한 의료기관에 인센티브를 주고, 보다 많은 비용을 청구한 의료기관에 삭감 및 디스인센티브를 주게 되면 의료기관들은 자연적으로 낮은 비용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과소 진료, 보다 싼 재료 사용, 보다 싼 약제 처방을 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의료는 하향평준화 되고, 국민 건강에 심대한 악영향으로 나타나게 된다. 

정부는 이러한 부작용을 질 평가 강화를 통해서 막겠다고 말하지만, 의료의 질이라는 것은 몇몇 지표들로 쉽게 표준화되고 계량화 되기가 어렵기 때문에 비용 절감이 유발하는 의료 하향 평준화는 막기 어렵다. 실제로 이 문제는 가치기반 심사 및 가치기반 지불제를 도입하고 있는 미국 등의 선진국에서도 해결을 위해 고민하고 있는 문제들이다. 우리나라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의료 수가가 높은 국가들도 과소 진료 등의 하향평준화가 문제가 되는데, 우리나라가 저수가 체계를 그대로 유지한 채로 이러한 시스템을 도입하면 과소 진료가 아니라 의료 체계 붕괴까지 걱정해야 할 정도로 부작용이 심각할 것이다.

2. 정부는 심사체계 개편을 이미 준비하고 있었고, 그 방향은 지불제도 전환임이 드러났다.

의료계에서 심사체계 개편을 요구하기 이전부터 정부는 심사체계 개편을 준비하고 있었고, 정부 입장에서는 무분별한 급여 확대 정책인 문재인 케어를 도입하면서 심사체계 개편의 필요성이 더욱 높아지게 되었다. 문재인 케어를 도입하면서 급여 항목을 확대하게 되면, 심사 항목이나 양이 대폭 증가하면서 기존의 방식으로는 심사를 하는 것이 어려워진다. 그리고 급여 항목을 확대하게 되면 그 자체만으로도 건강보험 재정에서의 지출이 늘어나고, 의료 이용량이 급증할 것을 감안하면 건강보험 재정 파탄 및 건강보험료 인상은 불가피한 상황이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정부 입장에서는 심사 체계를 간소화하면서도 보험 재정의 안정화를 꾀할 수 있는 방법이 필요하게 되었고, 그 해결책이 바로 가치 기반 심사체계 개편과 가치기반 지불제 도입을 통한 지불제도 개편이었다.

정부가 발표한 『건강보험 심사·평가체계 개편 방안』의 내용은 대부분 심평원의 '합리적 의료비용 운영을 위한 진료비 심사체계 개선방안 연구용역' 보고서 내용을 근거로 하고 있다. 최근 ‘바른의료연구소’에서 이 연구용역 보고서를 분석하여 발표한 내용을 보면 정부의 지불제도 전환 계획을 그대로 알 수 있다. 보고서에 나온 내용을 보면 진료비 심사체계는 지불보상방식의 개편방향에 맞추어 모든 참여자들(환자, 정부, 의료기관 등)이 비용대비 의료의 질과 결과 향상을 고려하는 가치기반 의사 결정을 하도록 지원해야 한다고 나와 있다. 결국 지금의 심사체계 개편은 지불제도 전환 계획과 함께 진행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런 명확한 증거들이 있음에도 정부에서는 이번 심사체계 개편안이 지불제도 전환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뻔뻔한 거짓말을 하고 있다.

정부가 12월 27일 건정심에 보고한 내용에는 가치기반 지불제 외에도 에피소드 기반 지불제, 묶음 지불제 등이 주요하게 언급되어 있고, 궁극적으로 인구기반 지불제로 나아가야 한다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내용은 미국에서 지불제도 개혁의 일환으로 행위별수가제를 대체하기 위해 고려되고 있는 다양한 대체지불 모델(Alternative Payment Model, APM)로 나와 있는 것을 그대로 가져온 것이다. 바른의료연구소에서 분석한 바에 따르면 이 대체지불 모델은 총 1~4까지의 카테고리가 있는데 카테고리1은 전통적 방식의 행위별 수가제를 말하고, 카테고리2부터 4는 가치기반 지불제의 다양한 형태를 나타내고 있다. 2~4까지의 카테고리에는 정부 보고에서 언급한 보고에 대한 지불(Pay for Reporting) 체계 도입, 묶음 지불제, 에피소드 기반 지불제 등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 미국이나 우리나라 정부나 궁극적으로는 카테고리4로 지불제도가 개편되도록 하는 것이 목표가 될 것인데, 이 카테고리4에 해당하는 지불제도가 인구기반지불제와 총액계약제이다.

정부와 의료사회학자들은 지금까지 각종 정책을 추진할 때, 의료계에 마치 당근을 주는 것처럼 말하면서도 몰래 지불제도 전환을 위한 장치들을 숨겨놓았었다. 2년전 의료전달체계 개편안 추진 시에도 그러했고, 현재 추진하고 있는 만성질환관리제, 커뮤니티케어에도 이러한 장치들을 교묘히 숨겨놓았다. 그런데 이번 심사체계 개편안에서는 아예 대놓고 지불제도 개편을 할 것임을 드러내었고, 최종적으로는 인구기반지불제 및 총액계약제로 진행해 나갈 것임이 밝혀졌음에도 겉으로만 아니라고 하니 어이가 없을 뿐이다. 하지만 더 어이없는 것은 정부의 이런 뻔한 거짓말에 가장 잘 속고 있는 곳이 바로 의협이라는 점이다.

3. 의협은 표리부동한 태도를 버리고, 심사체계 개편안 백지화를 요구하면서 의료계 자체적인 대안을 마련하여야 한다.

본 회는 지난 해 9월 경향심사의 도입은 문케어 정착의 핵심 요건이므로 반드시 저지해야 한다는 입장의 성명을 발표하였다. 당시 본 회는 성명에서 강력한 투쟁을 통해서 경향심사 도입을 저지하고 이를 문케어 저지의 전환점으로 삼을 것을 의협에 요구하였다. 그런데 최근 언론에 보도된 바에 따르면 의협은 경향심사라는 용어만 빠졌지 실제로는 경향심사를 도입하여 가치기반지불제로 지불체계의 전환을 준비하고 있는 현재의 심사평가 개편안을 표면적으로만 반대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공식적으로는 심사체계 개편안을 원점에서 재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실무회의는 지속하면서 동료의사 심사와 질환별 시범사업 지표 전문, 의학적 표준근거 중심 전문가심사제도 등에 대한 의견을 제시한 것으로 드러났다. 또한 이 과정에서 심사체계 개편안의 근본적인 문제인 경향심사 도입 등의 문제는 언급도 하지 않고, 주로 용어 변경만을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결국 정책의 핵심은 반대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생각된다.

지난해 말 한 회의석상에서 심평원이 2018년까지 심사 조정액이 기획재정부의 기관평가지표에 들어가 있었음을 시인했다. 그리고 같은 자리에서 복지부는 건별심사를 하지 않기 위해 심사체계 개편안을 추진 중이며, 향후 심사의 기준은 “적정수준” 이 될 것이라 말하면서 사실상 심평원에 심사의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는 듯한 발언을 했다. 그런데 의협은 이에 대해서 아무런 문제 제기를 하지 않은 것으로 보았을 때, 과연 의협이 그간 심평원이 불명확한 기준으로 자행한 무차별적인 삭감으로 인해서 고통을 받고 있는 회원들의 사정을 알고나 있는지 의문이 들 지경이다. 또한 의협 산하 의료정책연구소에서 지난 10월 발간한 전략 계획을 보면 향후 3년간 전략 계획 중 첫 번째 전략 목표로 건강보험제도 연구를 들고, 그 추진계획으로 심사제도 개선방안 (경향심사) 연구를 하겠다고 밝혔다. 그런데 그 외 다른 방식의 심사체계 개편 방안에 대한 연구는 전무해 사실상 현 의협 집행부가 경향심사를 찬성하려는 의도가 숨어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할 수 밖에 없다.

또한 의협이 심사체계 개편안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주장했던 가장 큰 원인이었던 TRC(Top Review Commitee)에 가입자 단체가 참여하는 문제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결론이 나왔다. 의협은 기존에 가입자 단체가 TRC에 참여하는 것을 반대하였으나 가입자 단체가 의료인을 추천하면 가능하다는 대답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이것은 아무런 실효성이 없고, 오히려 거부의 명분만 잃는 어리석은 결정이다. 아무리 의료인이라고 하더라도 가입자 단체나 정부의 의견을 대변하는 사람이라면 비의료인들과 다르지 않은 주장을 할 것인데, 이렇게 되면 반대를 하려고 해도 의협이 동의한 의료인의 주장이므로 반대의 명분이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의협은 결국 겉으로만 심사체계 개편안에 반대하는 모습을 보여서 의료계 내부의 반발을 막고, 실제로는 정부가 원하는 방향에 협조하여 전문가평가제, 면허관리업무 이관 등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하려고 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러한 표리부동한 태도로는 정부와 의료계 내부 어디에도 신뢰를 주지 못하게 되고, 어떠한 목적도 달성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이번 심사체계 개편안이 지불제도 전환을 위한 단계임이 드러난 상황에서 의협은 현재의 심사체계 개편 협의를 파기하고, 백지화를 요구해야 한다. 그리고 의료계 자체적인 연구용역 등을 통해서 우리나라 실정에 맞고, 의료의 자율성이 보장되면서도 지속 가능한 심사체계를 자체적으로 만들어 정부에 대안으로 제시해야 할 것이다. 각 직역 및 시도의사회와 의학회도 정부의 감언이설에 더 이상 속지 말고, 드러난 사실들을 정확히 파악하여 현재의 심사체계 개편안 백지화에 동참하고, 의료계 자체 대안 마련에 힘을 모아야 할 것이다.

본 회는 앞으로 심사체계 개편안의 백지화 여부를 예의 주시할 것이며, 이를 달성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 할 것이다. 그리고 정부의 잘못된 정책 추진에 행동으로 맞설 것이며, 의료계가 올바른 방향으로 가기 위해서라면 내부를 향한 쓴 소리도 마다하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하는 바이다.

2019년 1월 22일
대한병원의사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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